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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이슬람의 눈으로 보는 세계사]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하나의 지구에 종교로 나뉘는 다른 세계를 이슬람의 관점으로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타밈 안사리는 유서깊은 이슬람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미국으로 이민하여 서양의 문명을 공부하였다. 

9.11 사태이후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당시 상황이 자신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 지 말하는 편지가 인터넷에 급속도로 퍼진것을 계기로 기술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이슬람의 처음부터 9.11이전 까지의 상황에 대한 역사를 요약한 책으로 

서양의 세계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보는 여러가지 역사 상황을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었다. 

방대한 역사서를 블로그에 옮겨 놓을 수가 없어서

저자의 서문 중에 이책의 관점을 보여주는 부분을 발췌하여 작성한다. 


# 내가 '이슬람 세계'하고 할 때는 무슬림이 인구 중 다수고/다수거나, 통치자가 무슬림인 사회를 의미한다. 물론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지구상 거의 모든 지역에 무슬림이 거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런던, 파리, 뉴욕이 이슬람 세계의 일부라고 말하면 오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위에서 한정지은 정의로 따져 봐도 여러 세기 동안 '이슬람 세계'는 지구상에서 지리적으로 비중이 제법 크지 않았던가? 오늘날까지도 하나로 남아 아시아-아프리카 대륙에 걸쳐 있으면,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에서 거대한 완충 지대 역할을 하고 있지 않나? 물리적으로 보자면 유럽과 미국을 합친 것보다 더 넓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과거에 이슬람 세계는 단일 정치 독립체였으며, 지금도 이슬람 세계가 하나이며 정치적으로 통합되어 있다고 느끼는 무슬림 지도자들이 있다. 


9.11 이후로 인식이 달라졌다. 


서구의 비무슬림들은 이슬람이 무엇이며 무슬림은 어떤 사람들이며 이슬람 세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서구의 세계와 이슬람의 세계


그렇다. 둘은 기묘하게 평행한다. 서구의 세계사라는 틀 안에서 돌아보면 고대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독보적이던 거대한 제국이 하나 보인다. 바로 로마제국, 보편국가라는 꿈이 태어난 곳이다. 


이슬람 세계 어느 곳에서 돌아보더라도 절대적인 제국하나가 보편 국가의 이상을 품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것이 보이겠지만, 그 제국은 로마가 아니다. 이슬람 초기의 칼리프조[각주:1]다. 


세계사는 언제가 '우리'가 어떻게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며, '지금 여기'가 무었을 뜻하는 가에 따라 역사를 서술하는 모양새가 달라지기 마련이다. 전통적으로 서구의 세계사는 '지금여기'를 민주주의 산업(그리고 탈산업)문명으로 상정한다. 에기에 더해 미국에서는 세계사가 자유와 평등이르는 미국의 건국이념을 이끌었으며, 결과적으로 미국이 지구를 미래 사회로 이끄는 초강대국으로 부상했다고 생각하낟. 이러한 전제는 역사의 방향을 잡아서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길 어딘가에 목표점을 상정한다. 

이것때문에 우리는 인류 전체가 한 방향으로 향해 간다고 쉽게 간주해 버리는데, 늦게 출발했거나 천천히 움직여서 흐름에 뒤쳐진 나라를 '개발도상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서구 역사의 내러티브[각주:2] 

 이슬람 사회의 내러티브

 1. 문명의 탄생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각주:3])

1. 고대 : 메소포타미아 와 페르시아[각주:4] 

 2. 고대 (그리스와 로마)

2. 이슬람의 탄생 

 3. 암흑시대 (그리스도교의 부상)

3. 칼리프조 :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부활 : 르네상스와 개혁

4. 분열 : 술탄[각주:5] 제국의 시대 

 5. 계몽 (탐험과 과학)

5. 재앙 : 침략자들과 몽골족 

 6. 혁명 (민주주의, 산업, 기술)

6. 부활 : 3대 제국의 시대 

 7. 민족국가의 부상 : 제국을 향한 투쟁

7. 서양의 동양 침투 

 8. 제1,2차 세계대전

8. 개혁운동 

 9. 냉전

9. 세속 근대주의[각주:6]자들의 승리 

 10. 민주주의[각주:7]적 자본주의[각주:8]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여기 거대한 세계 둘이 나란히 존재한다. 


놀라운 점은 두 세계가 서로를 얼마나 모르는가다. 만일 서구와 이슬람 세계가 사람 두명이었다면 심리학에서 말하는 억압의 징후들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물어 볼 수도 있다.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어어? 둘이 한때 연인 이었나? 예전에 학대를 당한 이력이 있어?"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역사를 통틀어 볼 때 현재 이슬람 세계의 중심부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다. 

17세기 후반에야 두 내러티브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둘은 서로를 거스르는 물결이었기 때문에, 한 쪽이 물러나야만 했다. 그런데 서구가 더 강력했으므로 서구의 물결이 이슬람을 압도하고 휘저어 놓았다. 


하지만 그렇게 자리를 뺴앗겼다 해도 이슬람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역조처럼 수면 아래에서 계속 흘러왔으며 지금도 흐르고 있다. 현재 세계 분쟁 지역의 지도를 그려보면 - 카슈미르, 이라크, 체체니아, 발칸반도,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이라크- 공식적인 지도에서는 사라졌어도 죽지 않으려고 여전히 몸부림치는 독립체들의 경계선을 표시하게 된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역사 교과서나 학술 논문이 아니다. 

내가 당신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다. 



# 이 책을 읽을때 꼭 필요한 이슬람 교리의 구조



예언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는 누구인가?
수니파[각주:9], 시아파[각주:10]의 발생 배경은?


 

  1. 파티마 왕조, 파티마 칼리프조(아랍어: الفاطميون)는 아랍 제국의 시아파 이슬람 왕조로 909년부터 1171년까지 이집트, 북아프리카, 레반트를 다스린 왕조이다. 이 왕조의 군주 (칼리프)들은 이슬람의 시조인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왕조의 이름도 파티마라고 정했다. 이들은 이슬람 시아파의 또다른 분파인 이스마일파였다. 역대 칼리파[편집] 우바이드 알라 알마디(909년 - 934년) 알카임(934년 - 946년) 알만수르(946년 - 952년) 알무이즈(952년 - 975년) 알아지즈(975년 - 996년) 알하킴(996년 - 1021년) 알자히르(1021년 - 1036년) 알무스탄시르(1036년 - 1094년) 알무스타리(1094년 - 1101년) 알아미르(1101년 - 1130년) 알하피즈(1130년 - 1149년) 알자피르(1149년 - 1154년) 알파이즈(1154년 - 1160년) 알아디드(1160년 - 1171년) 파티마 왕조의 멸망[편집] 당시 무능한 칼리프 대신 비지르(재상)인 샤와르가 섭정을 하고 있었다. 샤와르는 이러한 명분상의 지배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고, 더 큰 권력을 얻기 위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었다. 이것을 사이가 틀어진 아들 카릴에 의해 발각되었고, 카릴은 하렘에 틀어박혀 있는 칼리프의 허락을 받아 아버지를 몰아내기 위한 원군을 요청했다. 그런데 그 원군을 바로 장기스 왕조의 2대 술탄인 누레딘에게 요청했다. 당시 누레딘은 장기로부터 물려받은 에데사와 알레포의 영토에서 제 2차 십자군을 패퇴시키는 등 십자군에 연전연승하며 상승궤도를 타고 옛 우마이야 왕조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를 비롯하여 형의 영지였던 모술과 이라크 지방까지 지배 하에 두고 있었다. 1169년 1월 2일 누레딘은 곧장 자신의 수도로 삼고 있는 다마스쿠스에서 8천 명의 기병을 편성하여 드물게도 쿠르드족 출신의 장군인 시르쿠(Shirkuh)가 이끌드록 했다. 기병으로만 편성했다는 것은 수니파와 시아파의 통일이라는 이슬람의 숙원사업을 재빠르게 자신의 손으로 이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육일 후인 1월 8일 시르쿠의 군대는 파티마 왕조의 수도 카이로에 도착했다. 재상 샤와르는 이들에게 위협을 느끼고 모습조차 나타내지 않았다. 이들을 부른 카릴은 기존의 합의대로 파티마조의 전 영토 중 3분의 1 가량을 누레딘에게 넘기기로 한 것을 명기한 증서에 조인한다. 이로써 이집트는 사실상 누레딘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시르쿠가 카이로를 잠시 비운 사이, 조카인 살라딘이 샤와르의 저택을 습격해 살해했다. 시르쿠는 카이로로 돌아와 죽은 샤와르 대신 자신이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칼리프도 곧바로 이를 승인했다. 두 달 후인 3월 23일, 시르쿠가 급사했다. 원인은 욕실에서 미끄러져 머리를 다친 탓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파티마 칼리프는 서른 한 살의 살라딘을 새로운 재상으로 임명했다. 이를 보고받은 누레딘은 시르쿠처럼 자신의 신하일 것임을 당연하게 여겼고,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왕 아모리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1170년 파티마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젊은 나이임에도 세상을 떠났다. 파티마조는 그 명맥을 이어갈 수도 있었지만, 실권력자인 살라딘이 다음 칼리프를 옹립하지 않음으로서 왕조가 단절되어 파티마 왕조가 멸망하게 된다. ( 살라딘은 당시 금요일의 예배 때 신도들도 하여금 기도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외우게 하라는 누레딘의 지시를 받았다. 시아파인 이집트인들이 앙숙인 수니파 술탄의 이름을 외우게 하는 것은 난처한 일이어서 명령을 거두어 달라고 하려 했지만, 누레딘은 명령에 복종하도록 압박하기 위해 살라딘의 아버지를 카이로로 보내 설득하게 한다. 하지만, 이 때, 시의적절하게 칼리프가 세상을 떠나면서 더 이상 시아파가 존재하지 않게 될 상황이 왔기에 살라딘은 다음 칼리프를 옹립하지 않음으로서 그 기회를 활용한다. [본문으로]
  2. 내러티브 (narative) 실제 혹은 허구적인 사건을 설명하는 것 또는 기술(writing)이라는 행위에 내재되어 있는 이야기적인 성격을 지칭하는 말.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는 인과관계로 엮어진 실제 혹은 허구적 사건들의 연결을 의미하며 문학이나 연극, 영화와 같은 예술 텍스트에서는 이야기를 조직하고 전개하기 위해 동원되는 다양한 전략, 관습, 코드, 형식 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쓰인다. 내러티브는 관객들에게 펼쳐지는 내용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고 이를 기초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인가를 예측하게 해준다. 그럼으로써 어떤 사건이나 감정의 발생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전개 과정을 보여 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내러티브 영화는 이러한 전략을 ‘현실’ 세계를 재생산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관객은 영화와 현실을 동일시하게 된다. 다소간의 이견이 존재하지만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동일시를 위한 수단이다. 영화의 기본이 되는 내러티브 구성의 원리는 오랜 기간의 실험과 검증을 거쳐 만들어진 ‘고전적 할리우드 내러티브 양식’(classical hollywood narrative style)이다. 이는 할리우드가 정식화한 내러티브 구축 스타일을 지칭한다. 할리우드식 내러티브는 장르를 막론하고, 이야기가 단계를 밟으며 점진적으로 상승해 완결된 결말을 갖는다. 1920~1930년대 할리우드에서 공고히 굳어진 고전적 할리우드 양식은 관객들이 가장 편안하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구조화된 스토리텔링의 메커니즘을 작동한다. 동일화에 기반을 둔 스토리의 선형성(linearity)과 안정성(stability)이 핵심이다. 이런 까닭에 자연히 영화적인 모든 요소는 스토리 전개에 복무하도록 짜여진다. 할리우드 영화는 스타일이 내러티브에 종속된다 하여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러티브 전개는 인과관계를 동력으로 전진하며 이들의 연쇄는 새로운 원인이 되고 새로운 결과로 이어진다. 우연성은 철저히 배제되며 그럴듯한 이야기와 사건으로 관객에게 몰입을 유도하는 것이 또다른 특징이다. 캐릭터는 일관성을 갖고 타인과 뚜렷이 구별할 수 있는 성격화된 인물로 확실한 목표를 향해 움직인다. 할리우드에서 이 같은 내러티브 구조를 바이블화한 것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이러한 메커니즘이 관객들로 하여금 가장 안정적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전적 할리우드 스타일에 대한 이론이 확립된 후 이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영화에서 내러티브, 즉 서술 구조는 영화 언어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상, 음향, 몽타주(montage)를 모두 포괄하는 영화 언어를 통해 달성되는 것이라는 견해가 그중 하나이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내러티브는 이야기를 전진시키기 위해 동원되는 드라마상의 장치들뿐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미장센(mise-en-scene), 카메라 워킹, 조명, 배우 등 스타일상의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된다. 즉 이야기는 이야기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형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영화 서사학자인 제라르 주네트(Gerard Genette)는 ‘디제시스’(diegesis)라는 용어로 이러한 개념을 설명했다. 그는 특정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건의 연쇄와 그 사건들의 다양한 관계를 디제시스라고 정의한다. 그러므로 디제시스는 스크린 위에 투사되는 이야기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영화 이론가들은 할리우드의 지배적인 이야기 서술 방식에 대항하기 위해 고안된 파괴적이고 비선형적인 영화들, 분열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영화들의 스타일을 ‘대안적인 내러티브’라 불렀다. 이렇듯 영화에서 내러티브는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구조화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불리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내러티브 [narrative] (영화사전, 2004.9.30, propaganda) [본문으로]
  3.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 : 현재의 이라크를 중심으로 시리아의 북동부,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된다.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부근을 경계로 하여 홍적대지(洪積臺地)인 북부의 아시리아와 충적평야인 남부의 바빌로니아로 나누어지며, 바빌로니아는 다시 북부의 아카드와 남부의 수메르로 나누어진다. 수메르에서 일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문명을 모체로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형성되었다. 강 유역을 제외한 지역은 사막 또는 반사막이며, 연간 강수량도 200mm 이하로 건조하다. 유역 일대는 연간 300mm 이상의 강우량과 하천 관개에 의하여 쌀 ·밀 ·보리 ·대추야자 등이 산출된다. 북부 및 동부의 습곡(褶谷)산지는 중요한 유전지대이며, 키르쿠크와 모술이 그 중심지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 (두산백과) [본문으로]
  4. 페르시아 제국 (Persian Empire): 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피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기원은 BC 815년경 오늘날의 이란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이란 민족의 한 지파(支派)가 우르미아호(湖)로부터 자그로스산맥을 가로질러 남하, 수사(Susa) 북동쪽에 있는 파르수마슈(Parsumash)에 정착한데서 시작한다. 이들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Elam)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왕자가 안잔(Anzan) 시를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딴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으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나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키루스 1세(Cyrus Ⅰ)는 페르시아인들을 통합했으며, 그의 아들 캄비세스(Cambyses)는 메디아왕국(Media)의 공주 만다인(Mandane)과 혼인함으로서 페르시아와 메디아를 통합했다. 캄비세스의 장남 키루스 2세(Cyrus Ⅱ, BC 559~529 재위)는 쿠루쉬(Kurush)라고도 불렸으며, 주변국들을 점령하며 페르시아 제국의 초석을 마련했다. 왕위에 오른 키루스 2세는 BC 550년 메디아의 수도 에크바타나를 점령하여 새로이 페르시아제국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 신흥국가에 대하여 동맹을 체결하고 대항한 카르디아, 리디아, 이집트 가운데 그는 우선 리디아를 쳐서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소아시아 연안의 많은 그리스계(系) 식민도시를 수중에 넣었다(BC 545년). 그리고 군대를 카르디아로 진격하게 함으로써 BC 538년 수도 바빌론을 무혈점령하고, 바빌론에 유폐되어 있던 이스라엘인을 해방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냈으며, 유대교의 신앙과 제례의식도 허가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 내의 많은 민족이 갖고 있는 종교나 관습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 것은 이 왕조의 방침이었다. 따라서 이것이 페르시아 문화가 다른 많은 문화의 영향을 받아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원인이 되었다. 서아시아의 중심이었던 바빌론의 점령은 그때까지 변경 국가였던 제국을 일약 세계제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으며, 따라서 키루스 2세가 대왕으로 불리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어서 B.C. 529년 아랄해 연안의 자카르테스(Jaxartes)유역의 스키타이를 정벌하기 위해 원정길에 나선 키루스 2세는 전쟁 중 마사게타이와의 싸움에서 사망했다. 키루스 2세의 생전에 성취할 수 없었던 이집트 정복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Kambyses II)가 왕위에 올라 수행했다. 그러나 그가 원정으로 자리를 비운 동안, 멸망한 메디아의 종교지도자 가우마타(Gaumata)가 캄비세스 2세의 동생임을 자처하며 왕권을 차지하려 했다. 이 소식을 듣고 이집트에서 돌아오던 캄비세스 2세는 재위 8년만인 B.C. 522년에 이집트의 시와(Siwa)에서 사망했다. 캄비세스 사후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졌으나, 그를 도와 페르시아의 군인으로 이집트 원정에 참가했던 아케메네스의 왕족 다리우스1세(Darius Ⅰ: B.C. 521~486 재위)가 이집트로 돌아와 B.C. 522년 가우마타를 죽이고 반란을 진압했다. 이후 다리우스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반란을 모두 진압하고 B.C. 521년 12월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위에 올랐다. 다리우스 1세와 그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 1세(Xerxses Ⅰ: B.C. 486~466 재위)의 통치 기간 중 아케메네스 제국은 전성기를 맞았다. 다리우스 1세와 크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에 아케메네스 제국은 동서로는 히파시스 강에서 리비아까지, 남북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에서 카프카스 산맥과 아랄해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전국토를 20개 주로 나누었으며, 징세와 병역을 부과했다. 또한 정복민에 대해서도 관대했으며, 각 지방마다 ‘사트라프’로 불리는 총독을 파견하는 한편, 왕의 직속 관리들이 총독을 감찰해 왕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주신(主神)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숭상심도 깊었다(그 편린은 그의 碑文에서 엿볼 수 있다). 또한 활발한 건축 사업을 벌여, 전국 각지의 기술과 재료를 총집결시켜 파르스의 페르세폴리스에 여름 궁전을, 엘람의 수사에는 겨울 궁전을 세웠다. 특히 다리우스 1세의 정복 활동을 묘사한 비수툰(Biston) 부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예술 작품과 세공품들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뛰어난 예술 양식을 보여준다. 도로망의 확충에도 관심을 기울여, 수도 수사와 소아시아의 사르디스 사이에는 총 2,400 km에 달하는 왕도(王道)를 건설하고, 역전제(驛傳制)를 도입하여 각 역에 역마(驛馬)를 상비함으로써 중앙정부의 명령을 신속히 전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도로는 평상시에는 상업교역로로, 전쟁시에는 수송로로 이용되었다. 이 역전제도는 오랫동안 서아시아 여러 국가의 모범이 되었다. 화폐제도의 확립과 금화(金貨)의 주조도 실시하여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였다. 다리우스 1세는 BC 513년 도나우강을 건너 스키타이를 정벌하고, BC 492년과 BC 490년 두 번에 걸쳐 그리스로 원정하였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실패로 끝나기는 하였으나, 그의 위정자로서의 공적이 대단하여 대왕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는 부왕의 유지(遺志)를 따라 그리스와 전쟁을 시도하였으나 유능한 지휘관 마르도니우스가 이미 죽어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그는 궁정 내의 음모로 살해되었다.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아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ses Ⅰ: B.C. 424년 사망)때 키몬의 평화체결로 그리스 원정의 결말을 보았다(BC 449). 그의 비문(碑文)에서는 아후라 마즈다 외에 토착신앙의 미트라와 아나히타의 신명(神名)을 처음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통치기부터 왕족 내부에 파벌이 형성되면서 제국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그의 뒤를 이은 크세르크세스 2세(Xerxses Ⅱ)는 소그드인에 의해 암살당했으며, 후계자 다리우스 2세(Darius Ⅱ) 역시 그 정통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다리우스 2세의 장남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rtaxerxses Ⅱ, 재위 404?-358 BC)는 반란을 일으킨 동생 소(小) 키루스(Cyrus the Younger, 키루스 3세, 424?~401 BC)를 죽이고 왕이 되었다. 이후 아르타크르크세스 3세(Artaxerxses Ⅲ, 재위 358-338 BC) 때에 이르러 아케메네스 제국은 B.C. 358년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진압하였으며 B.C. 343년에는 이집트를 다시 정복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3세(Darius Ⅲ: B.C. 336년 즉위)가 즉위할 무렵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3세(Alexander Ⅲ), 즉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그리스군을 이끌고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 제국 깊숙히 동진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그리스군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페니키아에서부터 이집트를 빠른 속도로 점령했으며, 다우가메라 전투(BC 331)에서 제국군대에게 결정타를 가했다. 다음해 6월 다리우스 3세가 자신의 부하 베수스(Bessus)에게 암살당하며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그 후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북서 인도에 걸쳐 아케메네스왕조의 영토 전체가 완전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으로 인해 헬레니즘 문명에 의한 페르시아 통치가 지속되다가 BC 250년에 파르티아 제국이 들어서면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그 후 사산왕조 페르시아, 사파비 왕조, 팔레비 왕조(1925~1979) 등에서 페르시아 제국의 명맥을 이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페르시아제국 [Persian Empire, ─帝國] (두산백과) [본문으로]
  5. 술탄(Sultan) : 술탄의 어원은 '통치자', '권위' 를 의미하는 아랍어에 있으며, 역사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녀왔다. 본래 이슬람의 코란에서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도덕적 책임과 종교적 권위를 수행하는 통치자의 역할'을 의미하는 비인격적인 용어로 사용되었으나, 시간에 지날수록 칼리프제 하에서 칼리프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특정한 지역을 지배하는 무슬림 통치자를 지칭하는 칭호로 사용되었다. 875년 아바스조의 칼리프 무으타미드(재위 870∼892)의 동생이 맨처음으로 이 칭호를 수여받았으나, 실질적인 의미의 지방 통치권을 의미하는 술탄 칭호는 후에 투르크계의 가즈나 왕조의 조상인 마흐무드(Mahmud 재위 998~1030) 때부터 사용되었다. 그 이후 술탄 칭호는 셀주크투르크, 오스만투르크, 아이유브, 맘루크 등 아바스 칼리파제 하의 지방 통치자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때 술탄의 의미는 종교적 권위를 의미하는 칼리프와는 상대적으로 군사적·정치적 권력을 의미하게 되었다. 술탄이 본격적으로 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게 된 것은 아바스조 하에서 날로 세력이 신장하던 오스만투르크의 술탄들 중 비잔틴 제국의 영토를 잠식하며 이슬람의 세력 확장의 기틀을 마련한 무라드 1세(Murad I 재위 1360~1389) 때부터였다. 그 이전까지 칼리프 칭호는 명분상으로라도 술탄을 임명하던 무슬림 최고 수장권자의 존엄성을 상징했으나, 무라드 1세 이후 여러 오스만 술탄들이 칼리프의 칭호를 직접적·간접적으로 사용하면서, 술탄의 의미가 이슬람 세계의 최고 수장권자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바스조의 멸망 이후 세워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살림 1세(Salim I 재위 1517~1520) 때부터 칼리프위와 술탄위를 동시에 수행했으며, 이후 마지막 술탄 압둘 마지드 2세가 국민대의회에 의해 술탄위를 빼앗기고 칼리프위만을 갖게되는 1922년까지 30명의 술탄이 제국을 통치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제는 비록 폐지되었으나 '술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던 초창기에 이 호칭은 지방 통치자를 의미했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여러 지역에서 지도자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란에서는 지방지사(地方知事)의 칭호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모로코 왕실도 초창기에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 외에도 모로코 ·아라비아반도 남부 ·카슈미르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토호(土豪)나 작은 군주가 정치적 지배자로서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도 오만(Oman)과 브루나이(Brunai)는 정부형태로 술탄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일부 부족의 지도자들이 술탄 칭호를 사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술탄 [Sultan] (두산백과) [본문으로]
  6. 근대주의(Modernism) : 모더니즘'이라는 원어로 통용되기도 한다. 근대주의는 사회사상ㆍ예술운동ㆍ신학사상 등에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자본주의 발전과정, 특히 그 제국주의 단계에서 형성되었다. 1) 사회사상으로서의 근대주의 : 제국주의 단계의 자본주의를 현실적으로 극복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의 사상과 운동에 대립하여, 단지 봉건적 잔재물의 제거를 주장한다. 결국 근대주의는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개화(開化)를 요구하는 사상이다. 2) 예술운동으로서의 근대주의 : 일반적으로 '모더니즘'이라고 불리워지는 주장과 운동으로서 19세기 말 낡은 관습의 고수를 주장하는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며 출현하였다. 그것은 또한 리얼리즘의 입장도 부정하고, 주관주의의 입장에 서서 주관의 인상이나 상념(想念)에 의거하는 인상주의ㆍ추상주의ㆍ초현실주의 등의 형태를 취한다. 3)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에 있어서 나타나는 근대주의는 프랑스의 르 르와(Edouard Le Roy, 1870~1954)와 르와지(Alfred F. Loisy, 1857~1940) 등으로 대표된다. 참된 종교는 오로지 인간의 내면활동에서 발견되며, 외면으로부터, 예컨대 계시나 교리 선언 등을 통해 전달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입장. 교회는 이와 같은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 억압하였다. 프로테스탄트 측에도 이러한 경향이 나타나 특히 '종교사학파'(독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라고 불리우는데,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여 종교의 존재를 유지하려고 하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근대주의 [Modernism, 近代主義]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본문으로]
  7. 민주주의(democracy) : 귀족제나 군주제 또는 독재체제에 대응하는 뜻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리스어(語)의 ‘demokratia’에 근원을 두고 있는데, ‘demo(국민)’와 ‘kratos(지배)’의 두 낱말이 합친 것으로서 ‘국민의 지배’를 의미한다. ‘국민의 지배’라는 민주주의는 여러 갈래로 해석되어 왔다. 초기 그리스에서는 시민권을 가진 남자들의 다수결원칙 아래 정치적 결정에 직접 권한을 행사하는 정부형태를 의미하였다. 이 제도를 ‘직접민주주의’라 한다. 한편, 국민 개개인이 직접 정치결정과정에 참여하지는 않고 다만 국민이 선출한 대표들을 통하여 정치결정 권한을 대리하게 하는 방식도 있다. 이것을 ‘대의(代議)민주주의’라 한다. 또 정부의 형태가 민주주의든 아니든 간에 사회적 ·경제적 평등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민주주의도 있다. 불평등한 개인의 소유재산을 평등하게 조정한다는 것으로서 ‘사회적 민주주의’ 또는 ‘경제적 민주주의’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민주주의의 해석에는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으나 기본원칙에는 변화가 없다. 민주주의의 필수 요건은 대략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국민은 1인 1표의 보통선거권을 통하여 절대권한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적어도 2개 이상의 정당들이 선거에서 정치강령과 후보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국가는 모든 구성원의 민권(民權)을 보장하여야 하는데, 이 민권에는 출판 ·결사 ·언론의 자유가 포함되며 적법절차 없이 국민을 체포 ·구금할 수 없다. 넷째, 정부의 시책은 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국가는 효율적인 지도력과 책임 있는 비판을 보장하여야 한다. 정부의 관리들은 계속적으로 의회와 언론에서 반대의견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시민은 독립된 사법제도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여섯째, 정권교체는 평화적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본문으로]
  8. 자본주의(capitalism) : 현재 서유럽과 미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은 ‘자본주의체제’라는 경제체제 아래서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제가 발생한 것은 인류의 유구한 역사에서 볼 때 비교적 오래지 않은 일이다. 이 경제체제는 16세기 무렵부터 점차로 봉건제도 속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는데, 18세기 중엽부터 영국과 프랑스 등을 중심으로 점차 발달하여 산업혁명에 의해서 확립되었으며, 19세기에 들어와 독일과 미국 등으로 파급되었다. ‘자본주의’라는 말은 처음에 사회주의자가 쓰기 시작하여 점차 보급된 용어인데, 자본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하여는 명확한 정의(定義)가 있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란 말은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예를 들면 이윤획득(利潤獲得)을 위한 상품생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도, 단순히 화폐경제(貨幣經濟)와 동의어로도 쓰이며(이 경우 부분적으로는 고대와 중세에도 자본주의가 존재하였다고 가정),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대하여 사유재산제(私有財産制)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 경제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K.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점,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점, 생산이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 등으로 보았다. W.좀바르트는 자본주의체제란 ‘서로 다른 두 인구군(人口群), 즉 지배권을 가지며 동시에 경제주체인 생산수단의 소유자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노동자가 시장에서 결합되어 함께 활동하는, 그리고 영리주의(營利主義)와 경제적 합리주의(經濟的合理主義)에 의해서 지배되는 하나의 유통경제적 조직(流通經濟的組織)이다’라고 정의하였다. M.베버는 근대자본주의는 ‘직업으로서 합법적 이윤을 조직적 ·합리적으로 추구하는 정신적 태도’라고 정의하였다. 요약하면 자본주의란 상품생산에 의해서 이윤을 획득하려고 하는 정신적 태도를 말하며, 자본주의체제 또는 자본주의경제란, 이와 같은 태도하에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는 유통경제조직을 말한다. 자본주의의 특징은 ① 사유재산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 ② 모든 재화에 가격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 ③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여 상품생산이 이루어진다는 것, ④ 노동력이 상품화된다는 것, ⑤ 생산은 전체로서 볼 때 무계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자본주의 [capitalism, 資本主義] (두산백과) [본문으로]
  9. 수니파 : 수니파는 신의 말씀인 꾸란과 함께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과 관행을 의미하는 수나(Sunnah: سنة , 관례, 법적 관행)를 따르는 사람들을 말한다. 아랍어로는 '아흘 알-순나(Ahl al-Sunnah, أهل السنة : 순나의 사람들)'라고 하며, 이를 줄여 수니파라 칭한다. 수니파는 대체로 아부 바크르를 비롯해 선출과 충성서약에 따라 즉위한 4대 정통 칼리프를 인정하고, 4대 이슬람 법학파(法學派) 중 어느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시아파 형성이 무함마드의 후계자인 칼리프 알리(재위 656∼661) 및 그 후계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정치적 입장에 바탕을 두었듯이, 수니파의 형성에도 칼리프 제도의 확립과 보유, 아랍 민족의 우월권 확보와 같은 정치적 이유가 작용하였다. 간혹 수니파와 시아파를 정통 이슬람과 이단으로 구분하여 보거나 민족적·종족적 의미를 담아 분리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수니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이며, 시아파의 대부분이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므로, 이 둘을 민족적·지역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이는 현재적 상황일 뿐 영속적이지 않음을 이슬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비합리주의적인 신학을 발전시켜 갔다면, 수니파에는 일탈(逸脫)과 혁신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정통파 신학과 시대변화에 따른 합리적 변화를 수용할 것을 주장하는 신학이 나란히 발전했으며, 수많은 법학자·신학자들이 등장했다. 그 대표적 신학자로 알 아쉬아리(al-Ash'ari), 알 가잘리(al-Ghazali), 파크르 알-딘 알-라지(Fakr al-Din al-Razi)를 들 수 있다. 수니파의 연구 중심지는 아바스왕조에서는 바그다드였으나, 1258년 이곳이 몽골군(軍)에게 정복되고 아바스왕조가 멸망한 뒤로는 카이로의 아즈하르대학교(972년 설립)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수니파 무슬림은 대부분 4개의 주요 법학파 중 하나에 속해있으며, 이 법학파는 이슬람 법 샤리아의 해석 방법과 샤리아에 대한 태도에 따라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하나피(Hanafi) 학파는 아바스조 초기에 이라크 쿠파에서 태어나 바그다드에서 사망한 아부 하니파(Abu Hanifa: 699~767)가 세운 가장 오래된 학파이다. 아부 하니파는 이슬람 법학자들 중 이성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이성주의자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따라서 하나피파는 자유롭고 융통성 있게 합리성을 추구하므로, 다른 법학파보다 교리상의 해석에 대해 더 유연하고 그만큼 덜 엄격하다. 오늘날 하나피 법학파는 터키, 시리아, 요르단, 중앙아시아 , 북인도, 이집트 북부 지역에서 지배적이다. 두 번째 학파는 말리키(Maliki) 학파로 메디나 출신의 이맘, 말리크 빈 아니스(Malik b. Anas:714~795)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이슬람 전승과 관행에 대한 지식의 권위자였으며, 따라서 이 학파는 꾸란과 하디스 뿐만 아니라 메디나 전통과 전승에 준거하여 법 이론을 발전시켰다. 말리키 학파는 오늘날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남부, 수단, 쿠웨이트, 바레인 등지에서 우세하다. 세 번째 학파는 샤피(Shafi'i)학파로, 8세기말에 이맘 말리크의 제자였던 무함마드 빈 이드리스 앗 샤피이(Muhammad b. Idris al-Shafi'i: 767~820)에 의해 세워졌다. 샤피이 학파는 말리키 학파의 법체계에서는 수나의 적용을, 하나피 학파의 법체계에서는 이성적 판단과 합리성의 적용을 비교적 최소화하고 엄격하게 함으로써, 두 학파의 법이론을 통합하고 절충했다. 또한 법적 쟁점에 대해서는 법학자와 신도 모두를 동등하게 포함하는 전체 공동체의 동의와 합의가 해결점이라고 여겼다. 오늘날 샤피이 학파는 팔레스타인, 레바논, 예멘 및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우세하다. 네 번째 정통 수니 법학파는 아흐마드 빈 한발(Ahmad b. Hanbal:780~855)에 의해 세워진 한발리 법학파이다. 이븐 한발은 법판단에 이성을 적용하는 것은 그만큼 신의 뜻인 순수한 진리에서 멀어지고 인위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음을 지적했으며, 전통과 전승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성적, 합리적인 것을 배격하고 하디스에 집착한 만큼 이 학파는 매우 보수적이고 엄격하며, 경직되고 관용성이 적은 법 체계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사우디 아라비아와 카타르 등의 국가에서 인정하는 공식 법학파이자, 이라크와 시리아에도 일부 추종자들이 존재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수니파 [─派] (두산백과) [본문으로]
  10. 시아파 : '시아'는 사전적으로는 '분파'라는 뜻으로 수니파(정통파)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아파는 수니파와 함께 이슬람의 한 갈래이며, 이 둘은 똑같이 정통 이슬람으로 여겨지고 있다. 간혹 이 둘을 정통 이슬람과 이단으로 구분해서 보거나 민족적·종족적 의미를 담아 이해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 오늘날 전 세계 무슬림 인구의 90%가 수니파이고 나머지 10% 정도가 시아파이며, 시아파의 대부분이 이란과 이라크에 집중 분포되어 있으므로, 시아파를 민족적·지역적으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이는 현재적 상황일 뿐 영속적이지 않음을 이슬람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아파가 출현하게 된 발단은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누가 이슬람 공동체의 지도자로서 그를 계승하느냐에 대한 교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후일 시아파를 이루게 되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관하여,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족 중에서 계승자가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여러 면에서 예언자의 사촌동생이자, 예언자의 딸 파띠마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된 알리(Ali)가 적격자로 여겼다. 그러나 칼리프 선출은 선거로 대표자를 뽑는 전통에 의해, 알리가 아닌 아부 바크르를 제 1대 칼리프로 결정하였으며, 아부 바크르를 인정하지 않고 알리를 추종하던 사람들이 후일 시아파를 형성하는 중심 세력이 되었다. 특히 정통칼리프 중 제 3대 칼리프 오스만(Uthman)에서 제 4대 칼리프 알리로 칼리프가 계승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갈등이 발생하며 시아파가 분리된다. 제 3대 칼리프 오스만이 새벽기도 중 암살당하고, 그 암살의 배후가 밝혀지기 전에 알리가 제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다. 그러자 오스만의 6촌 동생이자 당시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있던 우마이야(Umayyah) 가문의 무아위야(Mu'awiyah)가 오스만의 복수를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키며 알리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시작했다. 알리는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무아위야군과의 첫 전투인 낙타전투(A.D. 656년)에서 승리했으며, 두 번째 전투인 시핀전투(A.D.657년)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자 불리해진 무아위야군이 협상을 요구했으며, 알리 진영에서는 이 협상에 대한 찬반을 두고 내분이 일어났다. 알리는 협상에 임했으나, 이로서 그는 군사적 손실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칼리프로서의 지위가 반란자 무아위야와 대등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협상 반대파들은 알리 진영을 뛰쳐나가 '카와리지' 일파를 형성했으며, 1년 반에 걸친 협상에서 중재자들은 책략을 쓰는 무아위야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슬람 세계는 양분되고 칼리프 알리의 지위는 하락했으며, 이라크 지역으로 돌아간 알리는 카와리지파에 의해 A.D. 661년 1월에 살해되었다. 알리의 죽음으로 힘의 균형이 무아위야에게 기울었으며 그는 분열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는 한편 칼리프위에 올라 우마이야조를 세웠다. 무아위야(재위 661~680년)는 선출로 칼리프를 뽑는 전통을 무시하고 아들 야지드(Yazid)에게 칼리프위를 세습했으며, 야지드에게 위험한 인물이었던 칼리프 알리의 차남 후세인을 견제하고자 했다. 후세인(Husayn)은 이라크의 쿠파에서 자신을 칼리프로 추대하려는 지지자들의 초청으로 메카를 떠나 은밀히 쿠파로 향했으나, 카르발라(Karbala)에서 우마이야 가문의 충복 우바이둘라 빈 지야드(Ubidullah b. Ziyad)에게 살해당했으며, 그 일가족이 몰살당했다(680년 10월). 이러한 후세인의 비참한 최후가 알려지자 이라크 지방은 알리 가문에 대한 동정과 반(反)우마이야 정서가 고조되었으며, 결국 이들은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받아들이며 하나의 정파에서 종파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을 '시아 알리(알리의 추종자)' 혹은 '시아'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카르발라의 참극은 이슬람사에서 수니와 시아라는 무슬림 종파가 나뉘는 분기점이 되었다. 수니파는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4대 정통 칼리프와 역대 칼리프왕조의 칼리프(계승자·대리자라는 뜻)로 보는 데 반하여,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만을 정통 칼리프로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이맘(종교지도자)으로 보았으며, 각 유파마다 해석이 다른 신성(神性)을 부여하였다. 시아파에게 이맘의 지위와 존재는 수니파의 평가와는 매우 다르다. 수니파에게 이맘은 예배를 관장하는 종교지도자이며, 칼리프는 신의 계시와 명령에 따라 종교를 보호하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교 일치적 수장이다. 그러나 시아파에게 이맘은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스승이며, 알리와 그의 후계 이맘들은 모두가 범인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여겨진다. 즉, 이맘은 무오류의 초인적 존재로서 현세 문제뿐만 아니라 샤리아(이슬람 율법)상의 제만 문제에 대해 절대적 해석권과 판결권을 갖는다는 독자적인 교리관이 형성되어 있다. 우마이야조에 대항하는 수차례의 정치적 무장봉기에서 연속적으로 실패한 시아파는 심한 박해와 좌절을 격으며 운동 초기부터 지하로 숨어들었다. 오랜 지하 활동으로 인해 시아파는 여러 이단적 사상에 쉽게 물들었으며, 후에 동방 기원(起源)의 이교적 요소가 다분히 혼입되어, 수피즘과 같은 신비주의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그 유파는 매우 다양한데, 누구를 정통성있는 이맘으로 여기는가에 따라 크게 세 갈래로 나뉘었다. 본류는 12이맘파, 혹은 이마미파(al-Imamiyah)라고 불리며,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주류이다. 중요한 시아파 교리들을 정립했으며, 12명의 이맘을 모시고 있다. 두번째 분파는 자이디야(Zayydiyah)파이며, 제 5대 이맘 알 바끼르의 동생 자이드를 추종하는 파로, 초기에는 적극적인 반(反)우마이야 활동을 벌였으나 점차 교리적으로 가장 수니파에 가까운 온건파로 발전했다. 세번째 분파는 제 6대 이맘 자으파르 앗 싸디끄의 장남 이스마일(Ismail, A.D.760년 사망)을 추종하는 이스마일파로, 한때 이집트 지방을 통치한 파띠마조가 이 파에 해당한다. 이스마일파는 다시 여러 분파로 나뉘며, 그 중에는 꾸란에 언급된 7명의 예언자를 중시하는 7이맘파, 암살교단으로 악명높은 니자리파 등이 있다. 이들 이스마일파 이외에도 10-11세기에 걸쳐 누사이리(Nusayri)파와 드루즈(Druze)파가 생겨나 주로 오늘날의 시리아·레바논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아파 [Shi'a, ─派] (두산백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