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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징비록 / 유성룡]

징(懲) 비(毖)[각주:1]


# 도요토미 히데요시 

원래 중국인, 용맹스럽고 싸움을 잘한 그는 여러 번 공을 세워 높은 자리에 올랐고, 권력을 장악하자 마침내 아시카가의 왕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랐다. 일본 전역을 평정해 일본 66주를 통일. 


# 통신사의 엇갈린 보고

황윤길 " 곧 병화가 있을 것"

김성일 "저는 그런 상황를 보지 못 했습니다"


"그대의 생각과 황윤길과 크게 다르니 병화가 있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십니까?"
"나 역시 왜놈이 절대 쳐들어 오지 않을 것이라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황윤길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나라 안 밖이 놀리고 의심할까 봐 그리 해명했을 따름입니다."


# 이순신의 발탁

정읍 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 


# 당시 조정의 무장 

신립(申砬)[각주:2], 이일(李鎰)[각주:3]이 가장 명망이 있었다. 


#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다. 

왜병이 국경을 침범하여 부산포 함락.

상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임금께서 교지를 내렸다. "종사가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디로 가겠느냐?"
적병이 충주에 침입했다. 신립이 맞아 싸웠으나 대패하여 죽었고, 군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우리측이 한 번 이라도 나아가 이겼다면, 적은 당연히 후방을 고려하여 단번에 깊숙이 쳐들어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군사는 멀찌감치 피해 발라보기만 할 뿐 한 번도 교전하지 않았다. 

이제 후회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지만 훗날의 경계가 될 만하기에 모두 기록한다[각주:4].


# 임금의 가마가 서쪽으로 이동했다. 4월 30일 

경복궁 앞을 지날 때 시가지 양쪽에서 곡성이 계속 들렸다. 

"나라가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라가란 말입니까?"

임진강에 이르도록 비가 그치지 않았다. 


동파역에 도착했다. 파주목사 허진 장단 부사 구효연이 접대를 위해 파견되어 와 그곳에 부엌을 만들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루 종일 굶주린 호위병들이 부엌에 난입하여 마구 먹어지웠다. 

임금께 바칠 음식마저 없어지려 하자 허진과 구효연은 도망가 버렸다. 


정철(鄭澈)[각주:5]을 행재소에 불러오도록 명하시고, 내 죄를 물어 파직하고 유홍을 우의정에, 최흥원과 윤두수를 차례로 승진 시켰다. 


# 5월 3일 적은 서울에 들어섰다. 

처음에 적군은 동래에서 세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한 갈래는 양산, 밀양, 청도, 대구, 안동, 선산을 거쳐 상주에 이으로 이일의 군대를 패배시켰다. 

한 갈래는 좌도의 장기, 기장을 거쳐 좌병영의 울산, 경주, 영천, 신녕, 의흥, 군위, 비안을 함락시키고 용궁과 하풍지을 건너 문경으로 나왔다.가운대 길로 올라온 부대와 합친 후 조령을 넘어 충주로 들어갔다. 

충주에서 다시 두길로 나누어 하나는 여주로 달려 강을 건나고 양근에서 요진을 건너 서울 동부로 들어왔다. 

다른 하나는 죽산, 용인으로 달려 한강 남부로 들어왔다.  

한갈래는 김해를 거쳐 성주, 무계현에서 강을건너 지례 , 금산을 지나 충청도 영동으로 나와 진격하여 청주를 함락시키고 경기도로 향했다. 

7일 평양성에 입성했다. 


# 삼도 순찰사의 군대가 용인에서 크게 패하고 말았다. 

- 첫 승리....부원수 신각이 양주에서 적과 싸워 적 60여명의 머리를 베었다. 그런데도 조정에서는 선전관을 보내 군영에서 그를 참수하였다. 신각은 원래 김명원의 부관이었다. 한강에서 패배하고 난 후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다. 김명원은 임진에 있으면서 신각이 제멋대로 다른 곳으로 가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장계 하였다.죽음이 정당한 벌이 아니었고, 또 90노모가 있었으니 듣는 자마다 통탄해 마지 않았다. 


- 김명원과 한응인은 사기를 잃고 말을 타고 도주 하였다.  행재소에 돌아왔으나 조정에서는 문책도 하지 않았다. 


#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다. 

- 명나라는 왜가 아무리 강해도 이처럼 빠르게 올라올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가 왜병을 앞에서 인도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켰다. 종묘사직의 신주를 길에 떨어뜨리고 따르는 재신들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너희들이 평소에는 나라이 녹을 도둑질하더니 이제는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속이는 구나."


# 6월 11일 평양이 함락되었다. 어가는 가산에 머물렀다. 

- 임금께서 평양을 떠난 후 인심이 무너졌다. 

- 아랫사람에게 명령을 내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 원병을 청하면서 속국이 되겠다고 애걸까지 하였다. 적이 이미 평양을 함락했으니 그 기세가 병을 거꾸로 들고 물을 쏱아 붓듯이 거셌다. 다행히 적은 평양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성안에 몇 개월째 머문 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민심도 점점 안정을 찾았고, 나머지 군사들을 정비해 명나라 군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나라를 회복할 기틀을 갖춘 것인데 이는 진실로 하늘의 뜻이지 사람의 힘으로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 전쟁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몰아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이후로는 한 사람도 채찍질 한 적이 없다. 


# 이순신[각주:6] 거제 앞바다를 지켜내다. 

- 원균[각주:7]은 적의 기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 감히 출격하지 못했다. 전함 1백척과 화포, 군기를 바다에 다 빠뜨리고 수하비장 이영남, 이운룡등 하고만 배 네척에 나눠타고 곤양 해구로 도망쳤다. 

- 원균은 이영남을 이순신에게 보내 구원을 청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은 "각기 경계가 나누어져 있는데 조정의 명령도 없이 어찌 내 마음대로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가?" 라며 거절하였다. 원균이 다시 이영남을 보내 청하였다. 대여섯변을 청했는데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영남이 돌아 올 때마다 원균은 뱃머리에 앉아 멀리서 보고 통곡하였다. 얼마 후 이순신은 판옥선 40척을 거니리고 이억기와 힘께 저제로 와서 원균과 합세하기로 했다. 
이들은 진격하여 견내량에서 적과 마추졌다. 이순신이 말했다. 
"이곳은 바다가 좁고 수심이 얕아 배를 돌리기 어렵다. 후퇴하는 척하여 적을 유인해 넓은 바라에 가서 싸우는 것이 낫겠다." 
원균이 화가 나서 곧바로 나아가 맞붙어 싸우려 했다. 이순신이 말했다. 
"공께서 병술을 모르십니다. 이렇게 하면 반드시 집니다."
그리고는 깃발로 자기 배들을 지휘하여 후퇴하였다. 이를 본 적이 매우 좋아라하며 앞을 다투어 배를 달렸다. 

좁으데를 벗어나 넓은 바다에 이르자 이순신이 북을 한 번 울렸다. 모든 배들이 일제히 방향을 돌려 열을 지어 벌려 섰는데 적선과의 거리가 수십보도 되지 않았다.  모든 배가 대포를 쏘며 일시에 협공을 하자 연기가 하늘에 가득했고, 불에 탄 적선은 셀 수도 없었다. 
그 후에도 적은 잇따른 전투에서 모두 패배하였다. 그러자 부산, 거제에 숨어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적들은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올라오려고 했다. 이 한번의 전투에 힘입어 마침내 적의 한 팔을 잘라낸 셈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은 얻었어도 고립된 형편이라 더 전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라가 보존될수 있었던 것이다. 전라도, 충청도에서 황해도, 평안도까지 연해 일대를 지키게 돼 군량을 조달 하고 호령을 전하여 중흥을 꾀할 수 있었고, 또 요동 금복해, 천진, 등지가 영향을 입지 않아 명의 구원병이 육로를 따라 이동해 적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한 번의 전투가 가져온 공로였으니 하늘의 뜻이 아니겟는가? 이순신은 한산도에서 삼도의 수군을 통솔하여 적이 서쪽으로 올라오는 길을 막았다. 


# 심유경[각주:8]의 도착

왜군과 약속 하였다. 

" 내가 돌아가 황제께 보고하면 당연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50일을 기한으로 하자. 왜군은 평양 서북쪽 10리 밖으로 나가 있되 노략질을 해서는 안되고, 조선인은 10리 안으로 들어와 왜군과 싸우면 안 된다. "

이리하여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표를 만들었다. 

우리나가 사람들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헤아리지 못했다. 


강원도 조방장 원호는 구미포에서 적을 쳐 섬멸 했으나 춘천에서 싸우다 패아여 죽었다. 그리하여 강원도 전체에 적을 막을 자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훈련부 봉사 권응수, 정대임 등이 지방 군대를 이끌고 영천의 적을 격파해 영천을 수복했다. 

이로부터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에 있던 적이 모두 한 길로 모였다. 
좌도의 군읍이 보존 될 수 있었던 것은 영천에서 치를 이 하 번의 전투 덕이었다. 


좌병마사 박진은 경주를 수복했다. 


비격진천뢰[각주:9]를 사용했다. 비격진천뢰를 대완구[각주:10]에 넣어 발사하면 오륙백 보를 날아갔다. 땅에 떨어진지 한참 지난 후에 화약이 안에서 폭발했으므로 적이 이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 의병이 일다. 

전라도 김천일, 첨지, 고경명, 최경회

경상도 곽재우, 김면, 정인홍, 김해, 유종개, 이대기, 장사진

충청도 영규, 조헌, 김홍민, 이산겸, 박춘무, 조덕공, 조응, 이봉

경기도 우성전, 정숙하, 최흘, 이로, 이산휘, 남언경, 김탁, 유대잔, 이일, 홍계남, 왕옥

승군 유정, 

북도 정문부, 고경민

적의 첩자 김순량을 사로잡았다. 
"첩자질을 한 자가 너뿐이냐? 아니면 더 있느냐?"
그가 대답하였다. 
"모두 40여명입니다....일이 생길때마다 보고합니다."
서둘러 조사하여 모든 진영에 통보해 잡도록 했으나 잡흰자도 있고 놓친 자도 있었다. 김순량을 성 밖에서 참수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명나라 군사가 도착 했으나 적이 모르고 있었다. 이것 역시 유연히 생긱 기회였으니 하늘의 뜻이 아닐 수 없다. 

 

# 명나라의 참전

압록강을 건넌 군사가 4만여명을 헤아렸다. 


1593년 춘정월 초하루의 일이다. 왜는 소장 다케우치 기치베에게 왜병 20여 명을 이끌고 심유경 유격장군을 순안에서 맞이하도록 하였다. 사대수 총병이 함께 술을 마시자고 유인하고 복병이 일어나 종횡으로 공격 했다. 다케우치 기치베를 사로잡고  따라온 왜군 대부분을 죽였으며, 겨우 세명만이 말을 타고 달아났다. 

그제야 왜적은 명나라 군대가 온 것을 알고 크게 동요하였다. 


이튿날 아침 평양을 포위하고 보통문, 칠성문을 공격했다. 


그날 밤 왜적은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도망쳤다. 이시언, 김경로에세 적이 후퇴하는 길에 공격을 하라고 지시 하였으나 왜적과 싸우고 싶지 않아서 피해버렸다. 만약 우리 군이 고니시유키나가, 소요시토시, 겐소 등을 사로 잡았다면 서울의 적들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고, 가토 기요마사는 퇴로가 끊기도 군심이 술렁거려, 분명 바다를 따라 도주했겠지만 빠져나갈수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하여 천하의 일을 그르쳤으니 아, 참으로 애석하도다. 나는 장계를 올려 김경로를 참수하도록 청하였다.


# 평양성 탈환

     평양성이 수복되자 대동강 이만 지역에 주둔한 적은 모두 도망쳤다. 


# 행주대첩의 승리

전라도 순찰사 권율이 행주에서 적을 패배시키고, 군대를 파주로 옮겼다. 


유격장군 심유경이 재차 서울에 입성해서 적에게 후퇴를 권했다. 

제독은 전쟁을 계속할 의사가 없었다. 


# 서울을 수복하다. 

4월 20일 . 서울이 수복되었다. 

성안의 백성들을 보니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사람들 조차도 굶주려 야위고 지쳐있어 귀신 몰골이었다. 날씨도 타는 듯이 더웠고 죽은 사람과 말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악취가 성안을 메워 코를 막지 않고는 지날수가 없었다. 관청과 민가가 다 사라지고, 숭례문 동쪽 남산을 따라 아래쪽 일대에 적이 머물던 집반 남아있었다. 종묘와 세궁궐, 종루, 각 관사, 큰길 북쪽에 있던 관학 등은 허물어져 재만 남아있었다. 소공주댁은 왜장 우키타히데이에가 머물렀던 곳이라 온전할 수 있었다. 

제독은 적을 추격할 마음이 없었다. 


# 진주성의 함락

권율, 김명원, 이빈, 최원등은 전라도로 향했다.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은 진주로 들어갔는데 적이 쫒아와 포위하였다. 왜란이 일어난 이래 이 전투처럼 사람이 많이 죽은 적이 없었다. 진주성을 함락시킨 적은 부산으로 돌아가 명나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면 곧 바다를 건너가겠다고 공언하였다. 


10월 어가가 서울로 돌아왔다. 


심유경은 관백의 항복문서를 지닌 왜장 고니시 히를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겠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거짓으로 만든 것이 아닌지 의심하였다. 강화가 저들의 진심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조선 팔도가 굶주림에 허덕였고, 군량을 옮기는데 지쳤다. 

노약자들은 죽어 산골짜기를 메웠고 장정은 도적이 되었다. 

전염병까지 겹쳐 거의 다 죽었다. 

심지어 부자나 부부가 서로 잡아먹고 해골이 풀처럼 널려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왜를 조공국으로 봉하는 논의를 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세가지 일을 물었다. 

1. 봉작만 요구하고 조공은 하지 말 것.

2. 한 사람의 병사도 부산에 남지 말 것.

3. 영원히 조선을 침략하지 말 것.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봉작[각주:11]을 받을 것 처럼 굴더니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조선의 왕자를 놔주었으니 조선은 당연히 왕자를 보내 사례해야 한다. 그런데도 보낸 사신의 직위가 낮으니 이는 나를 없신여기는 것이다."


# 이순신을 하옥시키다.

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하옥 시켰다. 

성품이 음험하고 사특한 데다 안팎으로 연줄이 많은 원균은 이순신을 여기저기서 모함하고 다녔다. 

이순신을 천거한 사람이 바로 나였으므로 나를 좋아하지 않은 자들이 원균과 합세하여 이순신을 공격하고 나섰다. 의금부 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게 하고 대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했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한 다음 사형을 감하고 삭탈관직하여 군대 일반 군사로 보충해 넜었다. 당시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이순신이 하옥 되었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다 죽었다. 옥에서 나온 이순신은 아산에 들러 상복을 입고는 바로 권율의 막하로 가서 종군 하였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8월 2일, 한산도의 수군이 패했다.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이싸움에서 전사했다. 


한산도에서 승리한 적군은 남해, 순천을 함학시키고, 두치진에 와 상륙한 다음 진격하여 남원을 포위했다. 

의병장 곡재우가 창녕 화왕산성에 들아가 죽기를 각오하고 지켜냈다. 


#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다. 

다시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이순신은 군관 한 사람만 데리고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들어갔다. 

이신순이 진도에 도착해 병선을 거두었으니 겨우 10여척이었다. 

백성들이 가진 구리와 철을 모아 대포를 주조하고, 벌목하여 배를 만들었다.

원근에서 전쟁을 피해 숨은 자들이 이순신에게 의지하려고 모여들어 오두막을 짓고 물건 파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니 섬안에 다 들일 수 없을 정도였다. 


# 진린과 이순신이 합세해 왜적에 대항하다. 

9월 9일 중전께서 병화를 피해 서쪽으로 가셨다. 


# 나라를 구하고 세상을 떠난 이순신

10월 유정제독이 다시 순천의 적진을 공격하였다. 통제사 이순신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에 있는 적의 구원병을 크게 대패시켰다. 이 싸움에서 이순신은 죽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부산, 울산, 하동의 연해에 있던 적 진지가 다 퇴각했다. 


왜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현해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이 다 퇴각 했다.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候患, 내가 징계하노니 후환을 삼갈 수 있을까?-시경


나같이 재주 없는 사람이 국가의 중요한 임무를 맡았기에, 흩어져 떠돌던 혼란한 때, 위급해도 지탱하지 못하고 거꾸러지는데도 붙잡지 못했다. 지난 일을 생각할 적마다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그래서 한가한 가운데,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대력 기록하였다. 

애 유성룡

  1. 전에 있었던 잘못과 非理(비리)를 경계하여 삼간다. [네이버 지식백과] 징비 [懲毖]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2.15, 이담북스) [본문으로]
  2. 1546~15592. 북쪽 변방에 침임한 이탕개를 무찌르고 두만강을 건너 야인을 격퇴하는 등 많은 무공을 세웠다. 임진왜란떄 충주에서 배수진을 치고 왜군에 맞섰으나 패배하자 강물에 투신하였다. [본문으로]
  3. 1538-1601, 두 차례 이탕개의 침입을 저지하여 함북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임진뢔란때 명나라 원병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였다. [본문으로]
  4. 임진왜란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임진년부터 무술년까지 얼마간의 이야기를 총괄하였고, 이어 장게 소차 문이와 잡록을 그 뒤에 붙였다. [서애유성룡 /자서중] [본문으로]
  5. 1534-1602, 조선시대의 문신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금의 부름을 받아 임금을 호종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77&contents_id=3256 [본문으로]
  6. 1545-1598, 조선시대의 장수로 임진왜란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수군을 이끌고 전투마다 승리를 거두어 왜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본문으로]
  7. 1540-1597, 조선시대의 무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해전·합포해전·당포해전·당항포해전·율포해전·한산도대첩·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등에서 이순신과 함께 일본 수군을 무찔렀고 이순신이 파직당하자 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칠천해전(칠천량해전)에서 일본군의 교란작전에 말려 전사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균 [元均] (두산백과) [본문으로]
  8. 심유경(沈惟敬) : ?~1597 .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활약한 명나라의 사신. 평양성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화평을 협상했다. [본문으로]
  9.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 : 방어용 화기의 하나. 인마살살용으로 임진왜란때 화포장 이장손이 만든 포탄이다. 표면은 무쇠로 둥근 박과 같고 내부는 화약 등을 장전하게 되어 있다. [본문으로]
  10. 대완구 : 불씨를 손으로 점화해 발사하는 유통식 청동제 화기이다. [본문으로]
  11. 봉작(封爵):제후로 봉하고 관직을 내리는 것. [본문으로]